도서

[도서 리뷰/스포] 시인장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서미도 2023. 11. 12. 23:34

"탐정이여, 어떠한 사건에 휘말려도 동요하지 말지어다."

 

신코 대학교 미스터리 애호회의 회장, 아케치 교스케와 단 하나뿐인 회원인 '나', 하무라 유즈루는 시답잖은 이유로 영화연구부의 합숙에 따라간다. 합숙에 앞서 영화연구부의 부장 신도 아유무는 "올해의 희생양은 누구냐"는 협박장을 받았지만 웬일인지 합숙을 강행한다.

미인만 골라 참가시킨 합숙,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부장, 독특한 졸업생들.

 

하무라 유즈루는 합숙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안 좋은 분위기를 감지하지만, 저녁까지 별 탈 없이 바비큐 파티를 마치고 담력테스트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둘씩 짝을 지어 담력테스트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좀비 떼의 등장으로 합숙은 그야말로 지옥이 되어버리고, 아케치 교스케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을 잃고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숙소인 자담장으로 다시 도망치지만 바깥은 이미 좀비밭. 생존자들은 그대로 자담장에 갇히고 만다. 

 

자담장의 1층은 이미 좀비 떼가 지배했고, 2, 3층을 나눠서 사용하고 있지만 위아래 모두 안전하지 않다. 좀비가 되어 바깥을 배회하는 친구들. 언제 뚫릴지 모르는 바리케이드. 점점 떨어져 가는 물과 식량. 

 

그 와중에 영화연구부 부장, 신도 아유무가 잠겨있던 자기 방에서 좀비에게 참혹하게 물어뜯긴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잘 먹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적힌 메모가 발견된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신도를 죽인 건 인간이야? 좀비야?"

 

2층은 아직 좀비에게 뚫리지 않았음에도 좀비의 흔적이 분명한 시체, 그리고 좀비가 썼을 리 없는 메시지.

모순된 증거에 마침내 소녀 탐정은 수사를 시작한다!


네. 그렇습니다. 소녀 탐정입니다. 탐정역은 미스터리 애호회 회장인 아케치 교스케가 아니라 동대학 2학년인 겐자키 히루코다. 아케치 교스케, 이름부터가 너무 탐정인데 극 초반에 좀비가 등장하자마자 물려서 퇴장하고 말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전개에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게 뭐야.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라고. 너무 어이없어서 빵 터졌네. 좀비물인 줄 모르고 봤거든. 시대가 변해서 요즘 세상에 클로즈드 서클 만들기가 몹시 어려워지긴 했지만, 갑자기 좀비가 등장할 줄이야. 건물의 이름은 원래 자담장인데, 좀비가 등장하면서 '屍人장', 즉 시체인간(좀비)이라는 의미로 붙은 것이다.

 

근데 "소년탐정 김○일" 같은 걸 너무 많이 봐서 좀비물이라는 걸 끝까지 의심했다. 사실 이게 다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는 범인의 공작이 아닐까 하고. 근데 아니었음.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좀비물이었다. 근데 좀비물로도 그럭저럭 괜찮다. 두 가지 합치려다 망하는 경우를 자주 봤는데 좀비물이랑 정통 추리를 나름 잘 섞었어. 아니 좀비가 등장한 시점에서 이미 정통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오랜만에 고립된 공간에서 탐정이 진상을 밝히는 추리소설이어서 재밌었다. 배경 자체가 너무 터무니없긴 한데, 그런 조건에서도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꽤 납득이 가거든. 요새는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진상을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저런 증거를 조합해서 진짜로 '추리'를 했다는 느낌이다.

 

근데 좀 캐릭터 설정이 에바쎄바…. 진탐정역을 맡은 겐자키 하루코는 사건 체질이라 날 때부터 사건에 휘말려왔으며, 비밀리에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서 경찰에도 면이 있다는 미소녀다. 설정이 무슨. 게다가 초반에는 좀 날카로운 느낌이었는데 주인공에게 부탁을 하면서 이거 해주면 뽀뽀를 해준다느니, 무릎베개를 해준다느니. 가끔씩 분위기를 못 읽거나 덜떨어진 소리를 해가지고. 작가가 제멋대로인 츤데레 여주가 등장하는 라노벨을 감명 깊게 봤나.

 

충격적인 방향 전환이나 착실한 추리랑은 별개로 사건의 진상이나 동기는 좀 멕빠지긴 한다. 탐정과 화자를 비롯해서 등장인물들의 면면도 너무 특징이 없어. 누가 빠지거나, 누가 누구여도 크게 상관없는 느낌. 아케치 교스케는 명확하게 죽는 장면이 안 나와서 실은 살아있겠지하는 생각을 끝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좀비로 재등장해서 확인사살을 당했다. 진짜 죽었더라고. 근데 좀비물이었다는 것과 아케치가 진짜로 죽었다는 것 이외에는 대단히 무난한 소설이라서 명성에 비해서는 좀 부족한가 싶긴 함. 

※ 살인 동기와 방법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더보기

범인은 너무 평범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고, 동기는 작년 합숙에서 졸업생들에게 농락당해 자살한 친구의 복수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좀 더 쉬운 방법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신도의 죽음은 진짜로 좀비에게 물려서 죽은 걸 메모를 놔둬서 사람의 짓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사실 첫 번째 죽음은 우연이었고, 이후의 사건들이 진짜 범인의 목적이었음.

 

화자인 '나', 하무라 유즈루가 범인의 범행을 보고도 눈을 감아준다는 게 이제는 너무 식상하긴 한데,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