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지옥이 새겨진 소녀 - 안드레아스 그루버
오스트리아 빈 외곽의 숲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던 피투성이 소녀가 발견된다.
클라라의 어깨 밑부터 꼬리뼈까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소녀의 등에는 지옥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감금과 학대의 충격 때문인지 소녀는 입을 열지 않지만 경찰은 그녀가 1년 전 행방불명된 '클라라'라는 소녀라는 것을 알아낸다. 아동성폭행 전문 검사 멜라니 디츠는 소녀의 마음을 열고 증언을 얻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클라라가 발견된 장소 주변에서는 등가죽이 벗겨진 소녀들의 시신이 차례차례 발견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클라라의 등에 새겨진 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제8편을 묘사한 그림이고, 신곡 지옥편은 무려 34편으로 이루어진 대서사시인 것이다!
뮌헨 기동대 경찰이었던 자비네는 염원하던 독일 연방범죄수사국의 아카데미 교육생이 된다. 티나, 고메즈, 마익스너, 쇤펠트 그리고 자비네. 다섯 명의 "슈나이더 팀" 연수생들은 강의 시간에 각종 엽기적인 미제 사건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자비네는 강의에서 제시된 몇 가지 미제 사건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슈나이더에게 보고하지만, 슈나이더는 연수생은 수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출장을 떠나버린다. 혼자 행동하지 말라는 슈나이더의 엄포를 뒤로 하고 자비네는 독자적으로 수사를 계속한다. 마침내 이 미제 사건들의 연결고리가 나타나는 순간, 독일의 불연속 미제 사건들은 오스트리아의 클라라 사건으로 연결된다.
과연 소녀들의 등에 지옥의 문신을 새긴 사람은 누구일까.
슈나이더는 자비네의 능력을 높게 사면서도 왜 그녀를 수사에서 배제하는 걸까.
자비네는 살해 방법, 살해 장소, 피해자 타입과 용의자마저 모두 다른 미제 사건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한 걸까.
신장 163cm의 뮌헨 경찰 자비네와 범죄수사국 베테랑 프로파일러 슈나이더가 다시 만났다. 프로파일러 슈나이더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사실 굳이 말하자면 프로파일러 연수생 자비네 시리즈가 더 맞지 않나 싶은데. 그야말로 종횡무진, 자비네는 고삐 풀린 말처럼 여기저기 헤집고,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하면서 슈나이더의 뒷목을 잡게 만듭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1부에서 9부까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챕터 당 하루다. 1부는 9월 1일, 2일에 시작해서 마지막 9부는 9월 10일 화요일에 끝이 난다. 자비네는 입학한 지 일주일 만에 이 모든 우당탕탕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이다. 마치 이제 막 호그와트에 입학한 해리포터….
"당신이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나는 절대 설득당하지 않아요."
슈나이더 캐릭터성을 보면 BBC 셜록 홈즈가 떠오른다. 고독한, 까칠한, 천재, 마리화나 중독, 셜록에게 "기억의 궁전"이 있다면 슈나이더의 머릿속에는 영순위 용의자와 대화를 나누는 가상의 공간이 있다. 사실 내 사람에게만 따뜻한 차가운 도시 천재 캐릭터는 이제 좀 식상하기도 한데, 슈나이더가 딱 그런 인물이다. 남들한테는 세상 까칠하고 자기밖에 모르는데, 고독하고 어딘가 연약한 부분이 슬쩍슬쩍 보여서 내버려 둘 수 없는, 그러니까 오히려 통통 튀는 자비네랑 합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식상하다고 해도 역시 클리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이게 또 잘 먹히거든.
"호감이 가는 아가씨요."
슈나이더가 동성애자였다. 여자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 '일이랑 결혼했어요' 같은 느낌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여자'에는 흥미가 없었던 것. 하지만 자비네에게 연애 감정이 생겼냐는 질문에 명확하게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가능성은 열려 있다. 자비네는 잘 모르겠지만 슈나이더는 미묘한 감정을 보이긴 하는데, 자비네가 스물여섯, 슈나이더가 마흔일곱이니 로맨스가 싹트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크긴 하군. 이성애든 동료애든 두 사람의 티키타카도 소설의 쏠쏠한 재미다.
"솔직히 말해서……" 슈나이더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한테 동료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그건 바로 당신이 될 거요."
그 '슈나이더'가 인정할 정도로 자비네는 훌륭한 프로파일러 새싹이긴 하지만 자비네가 추리를 하는 생각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왜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어느 부분에서 전말을 깨닫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번뜩이며 정답을 떠올리는데, 사실 소설이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추리의 개연성은 좀 떨어지는 듯.
독일에서는 슈나이더 - 자비네 콤비가 전혀 다른 네 가지 미제 사건들을 조사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디츠 검사와 하우저 수사관이 클라라 사건으로 드러난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한다. 작가가 몇 가지 이야기를 풀어서 조합하고 합치는 능력이 참 좋은 것 같아. 잘못하면 이해도 잘 안 되고 중구난방이 되기 십상인데 말이지. 두 가지 흐름이 합쳐지고 공조를 시작하면서 전개에 속도가 붙는다. 액션 묘사는 별로 없는데도 마치 액션 스릴러를 보는 것 같은 스릴이 느껴진다.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소설이 마치 영화처럼 전개된다. 애초에 영화화를 노리고 소설을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냈으니까!"
그래도 이쯤에서 적당히 끊었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는데 반전 욕심을 내서 좀 오버한 것 같다. 첫 번째 반전이 나왔을 때는 오오 뭐야 하면서 봤는데, 비슷한 내용의 반전이 계속 나오다 보니 최종장에서는 좀 너무 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안드레아스 그루버 소설을 읽다보면 적당히 잔인한 사건은 장르 소설의 서두를 시작하기에 참 적절한 소재인 것 같다. 지난 이야기는 얼굴만 내놓은 채 시멘트에 굳어진 여자의 절규로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등에 지옥의 문신을 짊어지고 도망쳐 나온 소녀다. 왜 이들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일단은 궁금해서 읽을 수밖에 없음. 다만 초반에 호기심을 너무 고조시켜 놓은 나머지, 전말이 밝혀질 때 다소 김이 새는 건 어쩔 수 없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