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의 나는 돈 많은 밴호퍼 부인의 동반자로 고용되어 그녀의 말벗이 되어 주고 시중을 든다. 나는 그녀와 함께 몬테카를로에 호텔에 머물던 중 맥심 드윈터라는 41세의 귀족 남성을 만나고, 밴호퍼 부인이 감기에 걸려 침대에 매여있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맥심과 친분을 쌓고 매일 아침 그와 드라이브를 나가고 식사를 함께한다.
밴호퍼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맥심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그는 나에게 청혼을 하고 나는 맥심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녀나 다름없던 나는 갑작스럽게 귀족 부인이 되어 아름다운 경관으로 소문난 맨덜리 저택으로 향한다.
그는 내게 조금도 속해 있지 않다.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다. 아직도 레베카 생각을 한다. 레베카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 말대로 레베카는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맨덜리의 정원과, 저택의 모든 방과, 화병에 꽃 한 송이에서까지 맨덜리의 전 안주인인 레베카의 자취를 느낀다. 저택의 사용인들과 저택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나에게서 레베카의 모습을 찾는다. 게다가 오랫동안 레베카를 모셔온 맨덜리의 집사 댄버스 부인은 차갑고도 흠잡을 곳 없는 태도로 나를 점점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맥심은 단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죽은 뒤에도 저택을 지배하며 나를 좀먹는 강렬한 레베카의 그림자.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유명한 뮤지컬 <레베카>의 원작이다. 뮤지컬은 안 봤다. 레베카는 이미 죽었지만, 소설의 제목은 레베카고 소설 전반에 걸쳐서 레베카의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반면에 특이하고 사랑스럽다는 "나"의 이름은 작중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미스터리 첨가. 내용은 딱히 특별할 건 없는데도 재밌었다. 앞과 뒤가 다르게 재미있다. 처음에는 설렌다. 아니, 맥심이 잘생겼다잖아. 심지어 돈도 많고 신사적이고. 나랑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긴 하지만. 적어도 띠동갑 정도만 됐어도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음.
하지만 "나"가 느낀 그것이 사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결혼하기엔 너무 어렸고, 다른 일을 해본 적도 없고, 다른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다. 나는 속물적이고 말 많은 밴 호퍼 부인이 싫었고, 하녀나 다름없는 내 처지도 싫었고, 밴호퍼 부인을 따라 미국으로 가는 것도 끔찍하게 싫었다. 단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그냥 손에 닿는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게 아닌지.
주인공 "나"의 일인칭 시점인데, 주인공 성격이 너무 답답하다. 처음부터 소설 중반 지나갈 때까지. 아니 왜 말을 못 해. 댄버스 부인이 드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냥 죽으라고, 죽으면 편해진다고 창문에서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고 가스라이팅을 아주 가열하게 하는데. 듣고 있으면 속 터진다. 아니 왜 말을 못 하냐고. 그러는 너는 레베카도 없이 왜 사냐고 왜 말을 못 해!!
바다 밑에서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고, 맥심이 자신이 레베카를 죽였다고, 범행이 밝혀질까 두려워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노라 고백했을 때 나는 충격보다 오히려 환희를 느낀다. 맥심이 전처를 죽였다는 사실보다 그가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비로소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전과 똑같은 나였지만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점이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더 이상 레베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때부터는 '나'의 대응도 좀 봐줄 만하다. 댄버스 부인한테도 할 말 따박따박하고. 그래봐야 식사 메뉴에 훈수 놓은 것 정도지만. 지금까지 나의 태도가 맥심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땅바닥에 처박힌 자존감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재판은 잘 마무리되고 맥심은 무죄로 풀려난다. 나는 맥심과 맨덜리로 돌아오면서 희망찬 앞날을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그 아름답던 맨덜리는 이미 불길에 무너져내리는 중이었고 소설은 그대로 끝난다. 사이다는 없다.
책을 다 읽고 책의 초반부를 다시 읽으면 더 쓸쓸하다. 찬란하고 아름답던 과거는 이제 없고, 드윈터 부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작은 호텔방을 전전한다. 재판을 마치고 맨덜리로 돌아가면서 이제 행복할 거라고, 아이도 낳을 것이라고 단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말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아이는 없고 둘이서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정해진 거처 없이 떠도는 몸이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레베카의 그림자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인다.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건 차이도 우리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서로에게 아무런 비밀도 없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세상에 단 둘 뿐인 부부는 이제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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