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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리뷰/스포] 희생양 - 대프니 듀 모리에

by 서미도 2025. 6. 18.

우리는 오싹할 정도로 똑같았다. 

 

영국인 존은 프랑스로 여행을 왔다가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장 드게라는 프랑스인 남자를 만난다. 이것도 인연이라며 진탕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이미 장 드게는 존의 옷과 모든 짐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장 드게의 옷을 입은 존이 아무리 자신은 장이 아니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어차피 내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현듯 즐거워진 존은 장 드게의 집으로 가서 그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존은 장 드게가 가족들에게 사 온 선물들을 겉봉에 이름만 보고 나눠준다. 하지만 선물의 내용을 알게 된 존은 당황한다.

 

아내에게는 자신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로켓, 어린 딸에게는 책,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야한 속옷, 남동생에게는 발기부전 치료제, 누나에게 준 것은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적힌 터무니없이 값비싼 향수, 그리고 늙은 어머니에게는 마약성 진통제. 도대체 이 남자는 어떤 생활을 해 온 것인가.

 

장 드게는 아내와 딸이 있었지만 성 밖에 애인이 있었고, 심지어 남동생의 아내와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남동생 폴은 가업인 유리공장 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형이 가업을 내팽개쳤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 일을 하고 있다. 노모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 아프지도 않으면서 모르핀에 의지해 생활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장의 아내는 임신한 채 썩어가고 있다. 전쟁통에 장 드게의 손에 애인을 잃은 누나 블랑슈는 몇십 년이 지나도록 남동생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종교에 매달리며 남동생을 증오하고 있다.

 

장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존. 그의 태도는 장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장 드게의 개들을 제외하고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탄나버린 가족 관계, 망하기 직전인 재정상황, 온갖 걱정거리가 조롱조롱 달린 가족이지만 혈혈단신이던 존은 그 가족들과 고용인들에게 애착을 가지기 시작하고, 장 드게가 내팽개친 문제들을 해결하려 고군분투한다. 


도플갱어 이야기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라기엔 둘 다 그다지 가진 것은 없다.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며 바꿔 살아보는 내용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다. 주인공은 존은 일방적으로 교체당한 거지만. 같은 작가의 "레베카"보다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더 늦게 끝났다. 내용은 전혀 다른데 역시 소설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한데 번역이 너무 구리다. 직역을 했는지 문장이 무척 길고, 호칭은 왜 다 원어 발음으로 해놨는지 모르겠고. 

 

프랑스인 장과 영국인 존. 얼굴과 체형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똑같다는 점은 둘째 치고, 프랑스인과 영국인인데 각자의 언어를 전혀 위화감 없이 똑같은 목소리로 구사한다는 것도 일단 미뤄놓자.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물들의 마음이다.

 

장 드게의 가족들, 고용인들, 직원들 이웃들, 그 누구도 그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존이 장의 흉내를 잘 냈다기보다는 어차피 겉모습은 같고, 망나니가 좋게 변화한 편이니 그들은 그냥 바뀐 장 드게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딱히 선택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존이 자신은 장이 아니라고 했지만 믿지도 않았잖아. 원래 선한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만약 장 드게가 바르고 선한 인물이었고, 존이 개차반 날라리 짓을 하면서 난 장이 아니라고 했으면 믿었을걸. 아, 장은 저런 사람이 아닌데 진짜 다른 사람인가 봐. 이 경우는 망나니가 착하게 바뀐 것이므로 수용할만한 여지가 있다는 거다. 평소 까칠한 사람이 착하게 군다고 해서, 착한 너랑은 못 살겠어! 이렇게 선량한 건 네가 아니야! 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자기 갑자기 왜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정도는 말할지 몰라도. 

 

반대로 똑같은 가족을 두고 장 드게 본인은 넌더리를 냈지만 존은 애정을 느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더 정나미 떨어지는 이 가족에게서 존이 어떻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세상사 사람 마음먹기 나름이다. 하지만 존은 고작 5일 함께 있었을 뿐이고, 장 드게처럼 평생을 시달리면 마음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는 없었다. 희생양으로서 나는 그저 잘못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존은 자신을 희생양으로 지칭했지만, 글쎄…. 수혜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희생양 또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이 무엇을 잃었는가. 존이 그토록 아량 넓게 동생 부부를 여행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장의 딸이 태어날 아이에게 아버지를 뺏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공장이 문을 닫지 않고, 누나 블랑슈가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은 누구의 희생 덕분일까. 

내 관점에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희생된 것은 장 드게의 아내와 그 배 속에 아기뿐이다. 심지어 그 아내는 존의 아내도 아니다. 고작 5일 본 장 드게의 아내지. 돈이 없을 때 존은  그저 대책도 없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아이에게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남동생에게는 계약이 잘 처리되었다고, 직원들에게는 공장이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아내의 죽음이 막대한 유산으로 돌아오고, 돈이 생긴 후에는 그냥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휘둘렀을 뿐이다.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딸을 낳았다면 존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니 언제든 내팽개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장 드게의 땅을 밟았듯이.

 

도망간 장은 아내가 죽고 처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장은 존이 남의 재산으로 회복시켜 놓은 그 자리에 다시 들어앉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존은 그 상황에 대해 억울해할 권리가 없다. 존은 애초에 희생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장은 애초에 존의 재산을 싹 처분해서 도망갈 생각이었으므로 존의 직장에 대신 사직서도 내주고 방도 빼고 돈도 있는 대로 찾아서 알뜰살뜰하게 존의 일상을 뭉개놨다. 희생양은 아닐지언정 존을 피해자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장 드게에게는 어차피 막대한 유산이 생겼으니 차를 포함한 원래 존의 재산은 다 존에게 돌려주긴 했다. 장의 것을 장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 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돌아갈 곳 없이 떠나는 존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인다. 존이 장 드게의 일을 대신한 것처럼, 어떻게 보면 장 드게 또한 존이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해 준 것이다. 다시 혈혈단신이 되었지만 멀지 않은 곳으로 떠난 존은 이번에는 진짜 자신의 삶을 찾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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