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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리뷰] 짐승의 성 - 혼다 테쓰야

by 서미도 2024. 7. 26.

나도 평생 그런 일에 엮이지 않고 살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마도,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 소녀가 전화로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경찰이 마주한 소녀의 몰골은 처참하다.

온몸에 상처가 많고 발뿐 아니라 다른 부위에도 화상 자국이 여럿 있다는 얘기였다. 더구나 새 상처와 이미 아문 상처가 섞인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랜 기간 학대나 고문에 가까운 행위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고다 마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요시오 아저씨와 아쓰코 씨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진술하고 사건은 우선 상해 사건으로 분류된다. 마야는 자신이 지내던 곳의 주소조차 말하지 못했으나 경찰이 마야의 진술을 토대로 폭행장소로 추정되는 멘션 403호를 방문하자, 가해자라기에는 마야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몰골을 하고 있는 여성이 문을 연다. 아쓰코로 추정되는 여성은 "저희"가 집주인인 고다 야쓰유키를 죽였다고 자백하고, 폭행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넘어감에 따라 범행장소인 멘션을 조사하던 경찰은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받게 된다.

방마다 지문을 채취하고, 유류품과 증거품을 압수하고, 상해행위가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를 밝히기 위해 루미놀 검사도 실시했다. 그러자 욕실 전체가, 바닥, 벽, 욕조 모두 루미놀 반응으로 새파랗게 되었다.
"다섯 명이나 나왔어, DNA가. 더구나 그중 네 명은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높은가 봐."

마야와 아쓰코의 진술에서 나오는 이름은 늘 그들 셋뿐이었으나 실제로 발견된 DNA는 다섯 명. 이 사실을 여자에게 들이밀자 그녀는 비로소 사건의 경과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하고 경찰들은 악마도 기함할만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과 마야의 기억과 진술이 조금씩 엇갈리는 상황.
 
과연 그 짐승의 성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사건의 원흉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을 왜 순한 맛이라고 느꼈는가. 이 소설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일가족 가스라이팅 살인에 관한 소재라면 다른 소설은 다 이것의 아류처럼 느껴질 것 같다. 

"처음에 요시오한테 연애감정으로 빠져들고, 바로 돈줄이 되고, 그래도 부족해져 가족한테 기대고, 이번에는 그 가족도 요시오의 먹이가 되고, 저금을 뺏기고, 부동산을 뺏기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빼앗기는 거죠. (중략) 절단되고 해체되어 메밀국수 양념장 속에서 삶아지고, 믹서기에 돌려지고, 하수에 흘려보내졌겠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던가. 그 말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너무나 잔학한 사건이라 이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는데, 만화 사채꾼 우○지마에서도 이 이야기를 약간 순한 버전으로 볼 수 있다. 활자가 더 끔찍하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사회의 구도일까.
이게 짐승의 무리와 다른 게 뭐가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심지어 가족이 가족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게 경악스럽다. 여자의 진술 부분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는데, 읽는 내내 무서운 것을 앞에 둔 것 마냥 심장이 두근거린다. 단순히 사람이 죽고 잔인하고 이런 걸 떠나서 인간성이 조각조각조각조각나는데 역겹기 짝이 없다. 흔히 이 소설의 잔인함을 설명하면서 "살육에 이르는 병"이 같이 거론되곤 하는데, 글쎄…. 잔인함의 결이 다르다.
 
가스라이팅이 이렇게 무섭다. 주동자인 남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직접 고문을 하지도 않고 살인을 하지도 않고 누굴 죽이자고, 죽이라고 시키지도 않는다. 피해자들은 이건 내 잘못이고 죽은 사람의 잘못이고 돈을 갖다 바치는 게 당연하고 이 고문은 서로를 위한 것이며 가족을 죽이는 것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행동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여긴다. 약간의 폭력과 세 치 혀로 딸들이 아버지를 고문하고 엄마가 아들을 죽이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거기까지 떨어지는 걸까. 그 행동을 이해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런 가스라이팅 범죄에서는 피해자를 욕하기가 아주 쉽다. 저걸 믿어? 왜 저러고 있어? 도망을 쳐야지! 왜 신고 안 해? 시킨다고 저걸 하고 있어? 좀 모자라는 거 아니야? 나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기로 했다.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에서도 주모자에게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히 어디선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와 여성의 진술 사이사이에 관찰자인 신고의 시점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나마 이 소설을 르포에서 미스터리 소설로 만들어 주는 부분이다. 반전을 노렸거나 여운을 남기고 싶었거나. 이야기를 늘어뜨리는 느낌이긴 한데 이 소설의 결말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코미디는 웃기면 재밌는 거고 호러는 무서운 게 재밌는 거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극도로 재미있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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