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발렌타인 데이, 커버데일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하고, 사건 이 주 뒤 유니스 파치먼이 주범으로 체포된다.
유년시절 여러 가지 사정과 어른들의 방치로 인해 유니스는 글을 배우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적에는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고, 나이가 들자 글을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하는 것 자체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겨 역시나 배울 생각을 하지 못한다.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세금이나 부동산 같은 생활 속 자잘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었고, 그녀는 이것들을 회피하기 위해 커버데일 가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유니스는 집안일을 아주 잘했지만 글을 모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다. 업무 지시를 메모로 남겨놓거나, 심부름 거리를 적어주거나, 서류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거나 하는 자잘한 일들을 그녀는 처리할 수가 없다.
조앤 스미스라는 여자가 있다.
젊어서는 매춘을 했고, 결혼해서는 종교에 빠져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전도와 예배에 몰두한다. 유니스는 조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조앤이 매춘부였다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지만 조앤은 오히려 자신은 더러운 죄인이었노라고 당당하게 인정하고, 유니스는 여기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조앤은 남의 치부를 알아내고 심판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유달리 교양 있는 척하는 커버데일 일가가 밉다. 이들의 치부를 알아내기 위해 우편물을 몰래 뜯어보고 유니스를 이용해서 염탐을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두 여자가 만나서 상황은 나쁜 쪽으로 가속하고,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과연 유니스가 문맹인 것과 커버데일 일가 살인사건 사이에는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걸까.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짧지만 매우 강렬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영어권 소설에서 인상적인 첫 문장을 이야기할 때 손꼽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유니스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인간성이 결여되었고 죄책감 없이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 유니스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는 것을 들켰기 때문에, 그 수치심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스스로 문맹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남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유니스는 아예 타인과의 관계를 모두 차단해 버린다. 소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 날씨가 참 좋네요, 아기가 예쁘네요, 다행이네요 같이 - 사람 사이에 으레 주고받는 인사치레조차 하지 못한다. 또한 범죄가 범죄임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못한다. 간병이 귀찮아서 병든 아버지를 죽이고 푼돈을 벌기 위해 협박을 일삼는다.
문맹이어서 사이코패스가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유니스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지나치게 수치스러워했다는 점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글을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했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만, 유니스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니스는 사이코패스지만 미치지는 않았다. 감정, 상식, 인간관계 같은 것들을 배우지 못했을 뿐. 하지만 사이코패스가 진짜 미친놈, 조앤을 만나서 이상한 시너지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결국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이 주 후 유니스는 이 범행으로 체포되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유니스가 글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체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몰랐기에 결정적인 증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방치해 버렸고, 유니스는 그녀가 가장 피하고자 했던 결말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문맹임을 시인해야 했고, 이 사실은 신문 기사와 텔레비전을 통해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조지 커버데일과 재클린 부부는 선민의식이 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식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유니스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면 기꺼이 도움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선민의식에 으레 따라붙는 오지랖이 결국 독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처음부터 유니스의 범행을 밝히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별다른 추리는 필요 없다. 주인공 유니스가 감정이 없기 때문인지 분위기도 시종 담담하다. 마침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주인공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활자의 부재가 어떻게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었는지, 그 인과관계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스릴, 쇼크, 서스펜스를 생각하고 이 책을 선택하면 실망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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