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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도서 리뷰] 목화밭 엽기전 - 백민석

by 서미도 2023. 11. 20.

 

누군가의 평생을 망쳐버린다는 건 아무래도 흥분되는 일이다.

 

대학 강사인 한창림과 과외 선생인 박태자 부부는 서울랜드 옆에 살고 있다. 그들은 청소년을 납치해서 그들 부부와 함께 하는 스너프 포르노를 찍고, 피해자를 집 뒤 공터에 거름으로 묻는다. 이 포르노는 일명 '펫숍삼촌'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판매된다. 펫숍에는 아무것도 없다. 펫숍에서는 그저 시체를 만들고 시체를 처리할 뿐.

 

또 한 명의 거름을 공터에 묻고, 펫숍 삼촌에게 영상을 판매한 뒤 부부는 다음 희생자를 물색한다. 

"그 집은 애가 넷이나 돼.
그중 하나가 잘못된다고 해서 크게 불행해하지는 않을 거야." 

형제가 넷이나 되고, 건방지고, 품행이 불량하고, 무엇보다 엉덩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박태자의 옛 과외학생이 다음 희생자로 낙점된다. 부부는 등교 중인 학생을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한 뒤 조교한다.


양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한창림에게 폭행당한 회계사가 합의금조로 2000만 원을 요구하자, 분노한 한창림은 다시 그를 찾아가 이전보다 더 심하게 폭행하고 삼백만 원을 던져준다. 심하게 폭행당한 회계사는 고소를 취하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한창림은 오장근 형사와 얽히게 된다. 


박태자가 각성제를 구입하는 옷가게의 언니는 남편의 실직 이후 그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 점점 더 학대의 수위가 높아지던 와중에 박태자는 언니의 남편이 건 협박 전화를 받고 한창림과 함께 언니의 상태를 살피러 간다. 그곳에서 본 옷가게 언니는 알몸으로 의자에 거꾸로 묶인 채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 등과 함께 가격표가 붙여져 전시되어 있다. 한창림은 옷가게 언니 남편의 귀를 잡아 뜯어 쫓아버리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이 몇가지 사건들이 얽혀서 한창림-박태자 부부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납치된 피해자가 학대와 강간으로 거의 정신을 놔버릴 무렵, 영상을 찍으려던 부부에게 "귀 분실사건"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며 형사 오장근이 다시 찾아온다. 따로 오장근을 상대하던 한창림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를 폭행하여 기절시키고, 남편이 형사를 상대하는 사이에 납치된 남학생에게 젖을 물리려던 박태자는 피해자의 마지막 발악으로 가슴을 물어뜯기고 만다. 

 

아내의 부상으로 정신없는 사이, 정신을 차린 오장근이 도망가 버리고, 형사가 다시 돌아오면 "귀 분실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금까지의 패악질이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을 우려한 한창림은 아내의 가슴을 야매 의사에게 봉합시킨 뒤 그녀를 '펫숍'에 맡기고 홀로 도피한다. 펫숍에 방치되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박태자의 가슴은 서서히 곪아가고 그녀를 돌보기 귀찮아진 펫숍 직원들은 펫숍삼촌의 묵인 하에 그녀를 윤간한 뒤 처분해 버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뭐랄까, 희망이랄 게 있었다. 작전만 성공하면, 그는 아내와 함께 멀리 떠나 종적을 감출 생각이었다. 어디를 은신의 처소로 삼을지, 몇 시간이고 행복한 공상에 잠겨 있기도 했다.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 한창림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복수하기로 한다. 아내를 죽인 펫숍 삼촌에게, 자신들을 도망자로 만든 형사 오장근에게, 오장근을 끌어들인 회계사와, 옷가게 언니의 남편에게.


줄거리는 이게 다다. 어느 잔혹한 부부 이야기. 살인마 부부가 몇 가지 사건의 연쇄로 인해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 머리가 아프다. 아주 머리가 아파요. 이거 왜 19금 딱지 안 붙어있지. 목화밭 엽기전이라길래 엽기 살인마 이야긴 줄 알았지. 아니, 엽기 살인마 맞긴한데, 잔인하다기보다는 더럽다. 공포를 느끼고 싶었는데 무섭진 않고, 내용도 더럽고 묘사도 더럽고 내 마음도 더럽고….

 

한창림이 공터에 '거름'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분명 한국어인데도 잘 안 읽혀요. 묘사가 불친절한 편이라 초반에 설정이 다 잡히기 전에는 문장이 잘 이해가 안 된다. 거름이 그 거름인지 아닌지, 펫숍이 그 펫숍인지 아닌지.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내용도 역겨운데 문장도 꼭꼭 씹어 읽어야 이해가 되니 아주 곤욕이야

걸어가면서 그는 줄곧 아내 걱정을 했다. 몇 번이나 쏟아지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았다. 실제로 두어 번 찔끔거리기도 했다. 아내가 불쌍해서였다. 지랄병을 타고 난 것도 서러운데, 이십 대 젊음을 한창림이라는 괴물과 결혼해 탕진하다시피 했고, 이젠 또 혹 있을지 모를 추적을 피해 펫숍이라는 생시멘트 지옥의 배 속에 들어가 있다.
(중략)
약도 없이, 아내는 어떡하고 있을까,
그가 특별히 아끼는 목록 중의 으뜸은 아내였다. 아니 아낀다기보다는, 그 자신의 신체나 같았다.
(중략)
아내와 아내가 아끼던 그 모든 게 그였다. 그의 피고 살이고 뼈고, 으스러져 내릴 것 같은 사랑이었다.

이것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지독한 조울증에, 각성제를 시리얼처럼 먹고, 화가 나면 남편의 셔츠를 찢어발기고, 남편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으면 쇠젓가락으로 남편의 뺨을 긁어버리는 여자. 납치한 소년들과 아내의 포르노를 찍고, 그것을 팔면서도 한창림은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 이게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였던 것은 분명하다만. 끼리끼리 만났지. 아주 천생연분이에요.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한창림은 박태자와 함께할 도주의 단꿈을 꾸지만 펫숍에 맡겨놓은 아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그는 모든 희망을 버리고 마침내 복수하기로 한다.

 

이 소설에서 그나마 착한 축에 속하는 형사 오장근은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뽑혔으며, (말투가 좀 나쁘긴 하지만 딱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그냥 매너리즘에 빠진 경찰답게 자기 일을 했을 뿐.) 양담배를 피운다고 억울하게 얻어맞은 회계사는 지병이 악화되어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아내를 지독하게 학대한 옷가게 언니 남편은 귀 한쪽을 뜯겼을 뿐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악인의 최고봉인 펫숍 삼촌에게는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했다. 권선징악은 아니네. 더욱 강한 폭력 앞에서는 뭐든 무력하다.

하긴 신원을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사체 네 구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네 명의 후보보다 중요하게 다뤄지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박태자는 죽고 한창림은 체포되었다. 이미 끝난 사건인 것이다. 한창림-박태자 부부의 악행은 대선에 묻혀버렸고, 곧 잊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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